35년 유아교육 현장에서 본 조부모 육아의 현실, 부모가 꼭 알아야 할 5가지
맞벌이를 하다 보면 아이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가정이 많습니다. 조부모의 도움 덕분에 부모가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아이도 익숙한 가족의 품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어린이집에서 오랫동안 아이들과 가족을 지켜보다 보면, 조부모의 사랑이 너무 커서 오히려 부모와 조부모 모두가 지치는 경우도 만나게 됩니다.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조부모가 어떤 역할을 맡고, 서로의 부담을 어떻게 나누느냐입니다.
35년간 유아교육 현장에서 여러 가족을 만나면서 느꼈던 조부모 육아의 현실과, 부모가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방법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할머니가 키워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승원이는 만 3세부터 우리 어린이집에 다녔습니다.
매일 아침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등원했습니다. 할머니는 승원이가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돌아가곤 했습니다.
“승원아, 오늘도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아.”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손주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이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승원이가 만 4세가 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킥보드를 타고 어린이집으로 오는 승원이 뒤를 할머니가 숨을 헐떡이며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승원아, 그렇게 빨리 가면 위험해. 천천히 와.”
그러자 승원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싫어! 빨리 갈 거야.”
할머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승원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이가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서 떼를 쓰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모습이 반복되자 저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습니다.
할머니도 모르게 쌓이고 있었던 피로
“요즘 좀 힘들어 보이세요. 괜찮으세요?”
할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승원이가 요즘 고집이 너무 세졌어요. 위험하다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제가 승원이 부모님의 상황을 여쭤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승원이 엄마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아빠도 지방에서 근무해 주중에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승원이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부분을 맡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주고 계셨습니다.
아침을 챙겨주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하원 후에는 학원에 데려가고, 간식을 챙기고, 목욕을 시키고,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딸이 퇴근하면 그제야 잠시 쉬는가 싶었지만, 승원이가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또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할머니의 하루도 아침 일찍 시작해서 밤늦게 끝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할머니가 힘들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딸이 직장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겠어요. 내가 도와줘야죠.”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도와주는 것과 모든 양육을 대신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아이가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는 이유
승원이의 행동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익숙한 사람에게 오히려 짜증을 많이 내기도 합니다.
밖에서는 얌전히 있던 아이가 집에만 오면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편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상대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승원이 역시 할머니를 싫어해서 짜증을 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 보니, 할머니에게 자신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만 4세 전후가 되면 아이들은 “내가 해볼래”, “내가 할 거야”라는 마음이 커집니다.
킥보드를 빨리 타고 싶고, 혼자 해보고 싶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이가 다칠까 걱정됩니다.
“위험해.”
“안 돼.”
“천천히 해야지.”
아이의 마음과 할머니의 걱정이 계속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아이는 할머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계속 제지받는 답답함을 짜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조부모 육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
조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 키우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조부모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면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간식은 저녁 먹고 먹자”고 했는데 할머니는 아이가 안쓰러워 간식을 먼저 줄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장난감을 정리하고 다른 놀이를 하자”고 했는데 할머니는 아이가 힘들어하니 대신 정리해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차이가 계속되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반응을 비교하게 됩니다.
“엄마한테는 안 된다고 했는데 할머니한테 말하면 해주겠지.”
이런 식으로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을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규칙 몇 가지는 부모와 조부모가 미리 맞춰두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규칙을 똑같이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안전, 식사, 수면, 친구와의 관계처럼 중요한 부분만큼은 가족이 비슷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부모가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꼭 필요합니다
조부모에게 육아를 맡기고 있는 부모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워낙 잘해주셔서 제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꼭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퇴근 후 30분이라도 아이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책을 읽고, 오늘 어린이집에서 무엇을 했는지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말에는 한두 시간이라도 부모가 아이의 놀이와 생활을 직접 함께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 부모도 아이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요즘 이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친구 이야기를 자주 하는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이런 것들을 부모가 직접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조부모 입장에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건 엄마 아빠와 상의해서 결정하면 되겠다.”
라는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조부모에게도 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조부모가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쏟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도 자신의 생활이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취미생활을 하고, 병원에 가고, 편하게 쉬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족을 위해 아이를 돌보다 보면 조부모 스스로도 자신의 피로를 뒤로 미루기 쉽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하면 되지.”
“딸이 힘든데 내가 어떻게 힘들다고 하겠어.”
이런 마음으로 계속 참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엄마, 요즘 많이 힘들지 않아?”
“이번 주말에는 우리가 아이를 볼게. 편하게 쉬어.”
“엄마도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줘.”
이런 말 한마디가 조부모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조부모가 꼭 정해야 할 5가지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있다면 거창한 계획부터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 다섯 가지만 가족끼리 이야기해 보아도 좋습니다.
1. 누가 무엇을 맡을지 정하기
등원은 할머니가 맡더라도 하원 후 저녁 시간은 부모가 맡는 식으로 역할을 나눠보세요.
조부모가 모든 일을 책임지는 구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아이와 부모만의 시간을 만들기
평일에 짧은 시간이라도 부모가 아이와 온전히 함께해 보세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3. 중요한 생활 규칙은 미리 맞추기
간식, 수면, 안전, 미디어 사용 등 가족에게 중요한 기준은 부모와 조부모가 미리 이야기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누구의 방식이 맞는지 따지기보다 아이에게 어떤 기준이 가장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세요.
4. 조부모의 휴식 시간을 보장하기
“언제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 있는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말이나 특정 시간에는 조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않고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세요.
5.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기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만 이야기하지 말고 평소에도 서로의 상황을 이야기해 보세요.
“요즘 아이가 어떤가요?”
“엄마는 힘든 점 없어요?”
“우리가 바꿔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이런 대화가 쌓이면 작은 불편이 큰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시 만난 승원이 가족
승원이 엄마와 상담을 하면서 할머니가 아이를 얼마나 많이 돌보고 계신지 이야기했습니다.
엄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는 항상 괜찮다고 하셨어요. 저도 정말 괜찮은 줄 알았어요.”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피로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승원이 부모님은 작은 것부터 바꾸기로 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엄마가 승원이와 함께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기로 했습니다.
아빠도 가능한 날에는 일찍 귀가해 아이와 저녁을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할머니가 맡던 일을 한꺼번에 모두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신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가져왔습니다.
이 변화는 아이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좋은 변화였습니다.
1년 뒤, 할머니에게 생긴 변화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할머니의 얼굴은 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습니다.
“요즘은 좀 어떠세요?”
제가 묻자 할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저도 제 시간이 조금 생겼어요. 문화센터에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요.”
승원이와 부모님의 관계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빠에게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엄마와 함께 책을 읽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더 이상 아이의 하루를 모두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필요할 때 도와주는 든든한 가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조부모의 사랑은 아이에게 정말 큰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희생으로만 남아서는 안 됩니다.
조부모 육아의 핵심은 ‘누가 키우느냐’가 아닙니다
맞벌이 가정에서 조부모의 도움은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직접 키워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실제 가정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 부모와 조부모가 함께 건강하게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조부모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면 그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부모가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는 것.
조부모에게도 충분한 휴식과 자신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가족이 함께 이야기하는 것.
이 네 가지부터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마치며
35년 동안 어린이집에서 아이들과 가족을 만나면서 저는 많은 조부모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손주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크다고 해서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역할이 있고, 조부모에게는 조부모의 역할이 있습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부담을 나눌 때 아이도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할머니나 할아버지께 아이를 맡기고 있다면 오늘 한 번 이렇게 물어보세요.
“엄마, 요즘 많이 힘들지는 않아?”
그리고 아이에게도 물어보세요.
“엄마 아빠랑 같이 하고 싶은 건 뭐야?”
그 두 질문에서부터 가족의 양육 방식을 조금씩 바꿔갈 수 있습니다.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랑에 너무 익숙해져서 감사해야 할 도움을 당연한 책임으로 만들지는 않는 것, 그것이 부모와 조부모 모두를 지키는 첫걸음입니다.